
굉장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 그녀의 집안 관련해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데
김혜자 아버지 께서는
재무부 장관이셨고
우리나라 두 번째 경제학
박사였다고 합니다
성함은 김용택 씨 인데

그는 미군정 시절 재무부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김용택 재무부장관 께서는
1907년 군산에서 무역업을
하는 김홍두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홍두는
구복동(현 중앙로 2가)에서
천일상회를 운영하며

군산부 협의회 위원과
군산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죠
김용택 재무부장관 부친은
군산 노동공제회 초대 회장,
신간회 군산지회장,
교육후원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자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 높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혜자 아빠 께서는
군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보성중학교, 일본 명치 대학,

미국 미시간주 호프 대학을 거쳐
1937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 북미 유학생총회
이사장과 총회장을 겸했던

김혜자 아버지 김용택 씨는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다 1940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히게 됐죠

광복 후 대학 시절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추천으로
재무부장 자리에 오른 그는
청렴성과 깔끔한 업무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제1공화국
시절인 1952년 2월

사회부 차관에 발탁됩니다
김혜자 아빠 관련한 연관검색어가
생겼을 만큼 방송 이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김용택 재무부장관 께서는
17살에 두 살 연상의 규수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두 딸을
낳은 후 22살 때 유학을 떠나
미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보냈죠
그리고 15년 후 1940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 해 김혜자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처음 연기자가 됐을 때
어머니와 언니들은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좋은 배우가 돼서
좋은 연기를 한다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좋다며 열심히 해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한 바 있습니다
김혜자 아빠 께서는1950년대 중반
군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중동 274번지에 자그만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고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활동했죠 당시 중동은
빈촌으로 군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온
김용택 재무부장관 께서는
4회에 걸쳐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정당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본선에서
고배의 잔을 마셨습니다

결국 김혜자 아버지 김용택 씨는
1967년 공화당을 탈당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 중구 회현동 집을
정리한 후 은평구 응암동에
판잣집을 마련했죠
혼란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고관댁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던 미군정기와
자유당 시절 국방부 차관보,
사회부 차관 등을 거친
김용택 재무부장관 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혜자 아빠 께서는
딸의 사준다는 집도
한사코 거절하셨고
7월 16일 철거를 앞둔
여섯 평짜리 판잣집에서
생을 마감하셨죠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
김혜자 아빠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김홍두 씨도
엄청난 분이십니다
그는 1903년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데 당시
20대 중반으로

황실 재정을 담당했던
내정원에 대항할 정도로
자기 원칙에 충실하고
뚝심이 있는 객주였다고
전해지죠 또한
삼일운동(1919) 이후
조선 노동공제회 군산지회 고문,

군산 미선조합 조합장,
군산 청년회 회장,
군산 정미조합 및
군산 제승조합 고문 등을 지냈습니다
어둡고 가혹했던 일제강점기
긴장과 갈등을 감내하며

객주 정신을 지켜왔던
그는 지역 향토사학자들로부터
객주이자 민족 자본가로
소임을 다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김혜자 남편 관련해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그녀는 남편이 어떤 분이셨냐는
질문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했죠 이어 남편 얘기를
하면 눈물이 난다고 울컥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김혜자 남편 께서는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하면서 그녀를
걱정했다고 해요
그녀는 서민 어머니 연기를

많이 했지만 어릴적 집은 거실만
200평이었고 그 집에서
매일같이 댄스파티가
열렸다고 하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살림은 커녕 자기 몸
돌보는 수준의 생활도

매우 서투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혜자 남편 께서는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돌아가시기 전 축의나
부의를 한문으로
쓰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봉투에 한문을 한아름
써주고 떠났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었나
싶기도 하다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없으면 안돼'라는 말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을
보탰습니다 누구보다

한국의 국민 어머니상으로
불리는 여배우지만 실제로는
요리실력이 좋지 않을 뿐더러
김혜자 남편 또한 아내가
집에서 살림을 하기보다
연기 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응원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평생 동안 연기해 온
전업주부 어머니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셈이죠
김혜자 남편 분이 그녀보다
11살 연상이었는데
상당한 애처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췌장암이 발병했고 1998년
사망했죠 그녀는 자신은
천국을 못 가도 남편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어서
꼭 천국에 갔을 거라며
자신은 그래서 기도할 때
천국 문앞까지만이라도

꼭 가게 해달라고 빈다고
하는데요 이유는 남편에게
‘자기 미안해. 내가 너무 나빴지’
라는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한다며
죽어서라도 남편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진하게 드러내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 어리게 만들었습니다